추억80IN, 딱지계를 주름잡다.

Posted at 2010. 3. 24. 22:52// Posted in 사람사는 세상

딱지왕에 오르다.

80년대 초반,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엉덩이 산5번지에 살던 난 6살 무렵부터 동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는게 낙이었다.

신문으로 접고, 광고전단지로 접고, 수없이 많은 종이라는 종이는 죄다 딱지접는데 썼을 정도.

그러던 어느날, 동네 딱지계를 주름잡겠다는 야심을 품고, 나보다 6살 많은 우리형이 지나간 달력으로 딱지를 접기 시작.
 
달력을 겹친후 꽉 눌러주고 다시 겹치고 눌러주고 하여 여러겹으로 접어 단단하고 묵직하게 만들어 어느새 상당한 무게감을 자랑하게 된 달력딱지가 5개가 마련되자 우리는 동네 딱지계를 접수 하기 위해 위풍당당하게 나섰다.

카카. 결론은 우리 형제는 달력딱지5개로 동네 딱지계를 평정한후 딱지왕에 등극. 온 동네 딱지를 다 접수하고 나자 푸대자루 두개가 딱지로 가득 차 버렸다.

"야야 좀만 기다려."

동네 친구들이나 형들은 부랴부랴 딱지를 새로 만들어 오는 족족, 우리에게 딱지를 상납(?) 하고 말았다.
적수가 없어 심심해진 나는 나홀로 단독으로 옆동네로 진출. 그쪽 아이들과 붙어서 추가로 딱지를 따오게 되었는데, 이 놈들이 위 그림과 같은 박스종이로 만든 딱지를 가져 오는게 아닌가!

"가짜 딱지 취급안해."

나에게 딱지를 다 잃은 옆동네 아이들은 우기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서는 이거도 쳐줘."

아이들은 너도나도 같이 인정해야 된다는 듯 분위기를 몰아갔고, 그들의 성화에 못이긴 전어쩔 수 없이 받아줘야 했다. 그런데 박스딱지는 부피만 있지 무게도 없고 사방이 떠 있어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형의 철저한 관리를 받던 달력딱지를 두개 몰래 가지고 나왔던 내게 박스딱지 따위는 무게차이 때문인지 절대 아이들의 딱지에 넘어가지 않았고, 반대로 내가 치는 족족 다 넘어가 버렸다. 분한 친구 하나는 박스 딱지를 엄청 크게 만들어 오기도 했는데, 그때는 딱지 한쪽을 발로 밟고 옆으로 치는 수법에 다 넘어가버렸다.

네모난 딱지에 질릴 무렵, 아이들은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동그란 딱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인기 최고였던 프로야구 딱지 자료를 찾지 못하여 만화 케릭터 딱지로 대체>

게임방식은 참가자들이 일정수량을 각각 분담해서 딱지를 쌓아놓은 후 아랫부분에 파~하고 바람을 불어 넘어가는 것 만큼 가지고 가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사진을 보면 딱지 외곽에 별이 그려져 있는데, 이 별 수가 높은 딱지가 이기는 방식도 있었고, 글높 혹은 사람높으로 승패를 가리기도 했다.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입학하기전 이사를 가게 됐는데, 이삿짐에 딱지를 가득 담은 두개의 푸대는 속해 있지 않았고, 몇년이 지나도록 계속 아쉬워했었다.

메리야 놀자.

집 마당에는 메리가 살고 있었다.
 
메리는 종종 안보이고는 했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명령이 내려졌다.

"메리 찾아와" 

메리를 찾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찾았던 기억이 꽤 여럿인데, 나중에 왜 메리가 자주 탈출을 감행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구타'. 좀 씁쓸하긴 해도 그때는 개를 그렇게 귀하게 대하지 않았던거 같다.

아이들도 역시 개를 보면 발로 차고 그랬으니까. 심지어는 잔혹(?)한 아이들의 손은 잠자리 날개를 찢고, 개구리 뒷다리를 뜯고...

그렇게 항상 가족과 함께 했던 메리. 똥개피가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나름 그래도 진돗개였던 메리는 7마라의 새끼들을 낳았고,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새끼들이 젓을 너무 심하게 보채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항상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힘들어 했던 것.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한마리라도 남겨놨었어야해."

나중에 우리 식구들은 정들었던 메리를 보내고 난후 모두 한결같이 이와 같은 아쉬움을 토로 하고는 했는데, 바로 새끼 7마리를 모두 팔아 장식장과 책장을 마련한 그 아버지의 결단 때문이었다.

씩씩하던 메리는 새끼들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그 새끼들이 모두 사라지고 안보이게 되자 갑자기 아무것도 먹지 않기 시작했다. 어르고 달래고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절대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먹지 않아 말라가는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메리의 모성본능은 그렇게 새끼들이 사라진후 스스로 살고 싶은마음마저 앗아갈 정도로 강했던거 같다.


딱지치고, 메리와 뛰어놀고 그렇게 6~7살의 어린 나이를 보냈다.

 불놀이야!

산5번지에서의 짧은 2년여의 기억(5살이전의기억은없다)중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추억이 바로 마을과 엉덩이산 사이에 있던 논에서 했던 '연날리기' 와 '쥐불놀이' 였다.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벼의 수확이 끝난 가을과 겨울 중 바람이 강한 날이면 날리고는 했는데, 나름 이곳도 서울이라고 시골처럼 연을 날릴만한 장소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는 우리 동네가 준 시골 쯤은 됐으니...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논에 쌓아놓은 볏집에 온몸을 던저 씨름하고 레스링을 하며 온몸을 던저 부대끼며 놀았고, 옆에서는 연을 날리고. 명절이 찾아오면 쥐불놀이를 했다.

 바람구멍을 숭숭 뚤어놓은 빈깡통 양쪽에 철사로 길게 끈을 매달고, 그 안에 나무쪼가리들을 넣어 불을 붙인후  철사 중간을 잡고 빙빙 돌리면 깡통안에 있던 나무와 짚이 돌리는 힘으로 내부에 바람이 들어가게 디고, 나무와 짚은 활활 타오르게 된다.  돌리면 돌릴 수록 불길은 거세치고, 불길이 최고조에 이르르면 그것을 멀리 던져 버린다.

밤에 쥐불놀이를 하면 빙빙 돌리는 그 모습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쉬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 던저진 깡통은 마치 유성이 날아가듯 멋진 장관을 만들어 내며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불이라는 것은 생명을 뜻하는거 같다. 어린 마음에도 왠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묘해지고 들뜨고는 했었다.  그렇게 불을 담은 깡통을 돌리며 어린 시절 천진난만하던 어린아이는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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