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 강채윤의 절규는 왜 故노무현 후보수락연설과 흡사한걸까

뿌리깊은나무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과정을 그리면서 호평을 얻고 있습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호평만으로는 부족하며 뿌리깊은나무를 한국역사상 전무후무한 드라마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뿌리깊은나무의 리뷰를 적기전에 최근에 보게된 중국드라마 '대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합니다. 오래된 작품이어서 구석구석 헛점이 보이긴 하지만 나름 여러가지를 느끼게 해주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민간에 전설로 내려오는 검객인 규염객이며,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수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폭정을 일삼게 되자 규염객을 비롯한 의인들이 궐기를 하게 되고, 결국 당태종인 이세민이 집권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세민의 아버지이자 당을 세운 고조 이연은 수양제의 폭정에 대항해 궐기를 하고 황제의 위에 스스로 오른 후 돌궐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규염객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해 놓고도 뛰어난 인재가 자신의 신하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제거하려고 합니다. 드라마 내용이 역사적 진실과 100%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피를 흘려 쌓아 올린 권력의 힘은 그것을 위협하는 그 무엇도 용서하지 않으며, 설혹 그것이 잠재적 위험이라 하더라도 싹이 자라는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권력자의 정치는 결국 변화의 싹을 자르는게 최우선 과제인 것일까.

 

참여정부와 사학법의 개방형이사제
기득권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뿌리부터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이 시작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참여정부시절 사학법을 개정하려 하자 학연으로 엮인 거의 모든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거부하고 나선것은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의사결정권이 없는 수의 개방형이사조차도 변화의 시작이 될 단초가 된다면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라 하여 반대했던 것입니다.

 최근 연세대가 정관을 개정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연세대는 기독교 4개의 교단연합과 사회유지인 등으로 이사진을 구성하여 건학이념도 지키면서 균형을 잘 갖추고 있었는데 사학법에 찬성하던 교단에 속한 인사의 후속이사선임을 미루고 방우영 이사장이 자기 뜻대로 정관마저 개정하여 권력이 균형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계의 주장을 그대로 표현하면 방 이사장이 사학법 개정에 찬성하는 외부이사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경우라면 눈치도 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일을 처리하는게 권력을 가진자의 속성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권력에 의존하고 있는 인사들은 스스로가 권력자가 아니라 단지 그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맙니다. 얼마전 나는꼼수다 30회 분량에서 나온 말을 빌리자면 조중동의 기자들은 한미FTA로 인해 자신들도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들이 마치 소수의 헤택을 보는 이사진쯤은 되는 것인양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행동을 하며 기사를 써댄다는 것입니다.  

실은 이점이 권력자가 권력을 지키는데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 방법입니다. 과거 정창인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문: 서민죽이는 노무현의 세금폭탄] 이 글에서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를 공격하기 위해 양극화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종합부동산세를 세금폭탄이라하여 당시 야당은 언론과 합작하여 정권내내 국민들을 겁주었는데, 재밌는것은 당시 세금폭탄이라 했던 그 문제들을 되짚어 보면 전국민의 단 몇프로의 극소수만에게 지워지는 문제를 몇십프로의 국민들이 자기일처럼 극구 반대하며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방패막이 전술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는것 같습니다.

뿌리깊은나무가 던지는 현실의 메시지
그럼 뿌리깊은나무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7화에서 성균관 유생은 반촌의 노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장원까지 차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밀본 본원 정기준의 명을 받아 반촌노비를 암살하고, 글자반포는 중화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비의 나라라는 근간을 해치는 것이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던집니다.

 글자를 알아 무에 쓰겠느냐고 화를 내는 주인공을 보면서 매우 답답해 하던 시청자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과거의 많은 문학작품에는 그러한 생각의 차이가 아주 극명히 드러나 있는 편인데 현대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 녹아 있는 고전의 경우 외면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운게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의 사고와 인식의 차이는 뿌리부터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균관의 선비는 선비로 자라나 선비는 당연히 중화의 질서에 순응하고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잡학으로 치부하며 오직 성리학만으로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선비의 이상을 온통 가슴속에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정치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강채윤이 다를게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중국 당태종 조차도 그가 승자였기에 남겨진 기록으로 치부할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세종대왕님이 직접 친제하신 한글은 그 존재 자체가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담겨 있음을 존재 자체가 증명해주고 있으니 우리는 그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창제한 글인지 알고 서슴없이 그 대상에게 존경어린 마음을 보낼 수 있으니 한국은 행운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어느나라의 문자도 이렇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군왕이 친제한 경우는 없고 심지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니 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입니까. 이정도면 두고두고 기린다해도 결코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이면서 세계에 자랑하고픈 최고의 유산이니까요.

 

 

이방지 : "너는 다를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소중한이의 소중한 것을 지켜줘야지. 무사로서의 임무는 하고 가야지. 남자로서 무사로서 다 쓸데 없는 자존심이다. 차라리 그 순간 치사하고 비겁하게 살아. 백성은 말이다. 오로지 자기 기쁨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

강채윤 : "도데체 어째서 백성은 왜! 도대체 왜! 치사하고 비겁해야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故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경선후보에서 이기자 후보수락연설에서 명연설을 남기신바 있습니다.

"조선 건국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로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데로 물결치는 데로 눈치 보며 살아라'"...하략...


 

반복되어 온 역사의 비합리적인 사슬을 우리 손으로 끊어야 한다.

정기준은 중화와 선비라는 두가지 축을 두고 밀본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화의 질서는 문자반포를 막아 지키고, 과거시험을 통해 선비의 나라를 지킬 수 있으니 전조의 귀족제를 폐지한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층은 피지배층이 정치에 대해 더 알아봐야 다스리는데 방해나 되지 도움은 되지 못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발상은 수백년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합니다.

 임금이 직접 백성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선택권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축복이자 행운일 것입니다. 남자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세종의 모습은 너무나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극중에서 세종은 소름끼치는 예언을 합니다.

"백성들이 글자를 안다면, 배우고자 할것이며, 배우고자 할 것이고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꿈틀댈 것이다.

(최만리) "그 꿈틀이 신분질서를 무너뜨릴 것이옵니다"

"언젠가는 무너진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더냐?"

전조 고려의 권력의 세습을 타파하고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조선은 다르다고 항변하는 최만리에게 세종은 한자를 아는이만 시험을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이대로 가면 백년뒤엔 서얼들의 과거가 금지될 것이고, 이백년이 지나면 양반들만 시험을 보게 될 것이고, 삼백년이 지나면 양반을 사고파는 지경이 될 것이다."

지키기 위해 안주하려는 자들은 그것을 안정이라 부르지만 결국 썩어가게 될 것으로 모르고, 권력에 취해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며 도전하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려 하지만 정작 앞으로 한발자국 내딛어야 고인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누군가가 발걸음을 떼려 하면 권력자 혹은 권력에 기댄자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경고하고 위협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넌 나서지 마라. 라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물러서지 않고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의지를 관철시킵니다.

글자를 만들어 반포한다하여 세종대왕에게 무슨 득이 있을까요. 편안한 삶을 저버리고 국민을 위해 나섰던 노무현 전대통령이 지인들이 수사를 받고 힘들어 하는것에 괴로워했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눈 똑바로 뜨고 누가 진정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지 앞으로 똑똑히 지켜보아야할 것입니다. 글자를 배워 부당한 권력에 희생되는 이가 없는 세상에 살길 바랐던 세종대왕님의 후손이 우리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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