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마음의 양식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생활이 바쁜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읽을때는 마음이 편해져. 그런데 시간이 잘 나지를 않아"

대개 이러한 생각을 하거나 혹은 타인으로부터 들어봄 직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책이라는 것은 습관이어서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화장실갈때 교통수단을 이요할 때등 언제든지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친구입니다.

국내 최대 인기온라인 서점및 오프라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년 기념으로 발행된 '노무현 자서전 - 운명이다' 는 거센 열풍을 일으키며 단숨에 베스트셀러1위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운명이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이해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기록을 일관된 문체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꼬박 6개월 동안을 이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들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을 통해 보완했다. 또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그 밖에 가까이에서 고인을 지켜봐온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여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였다.

이 자서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자서전의 집필 시점(고인이 회고록 초안을 위해 메모를 시작하는 시점)인 서거 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1부 ‘출세’는 출생에서부터 부산상고에 입학해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 ‘꿈’은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게 된 이야기부터 정치에 입문해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부터 대통령 재임기간의 일을 담고 있다. 4부 ‘작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실패한 후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리자인 유시민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상황을 정리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감사의 말을 썼다. 본문에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올컬러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왜 유시민이 정리하였을까

 

예스24 회원이신 bloodlee 님은 이런말을 포스트에 적었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2230729

"책 출간 소식에 붙여진 목차를 보면서 책의 내용이 노무현 대통령의 첫 자서전 격인 [여보, 나좀 도와줘]와 [성공과 좌절] 부분이 많이 겹칠거라 예상했는데 총 4부로 이루어진 내용에서 1,2부 그리고 3부의 상당 부분이 [여보, 나좀 도와줘]와 겹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유시민 지식소매상의 1인칭 시점 서술이다. 노무현과 가장 닮았다는 정치인 유시민이 진짜 노무현이 되는 순간이다. 글빨이나 말빨은 유시민이 한 수 위인 것을 감안하면 더 세련된(?)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시민은 참 이시대의 HOT한 이슈를 몰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지만 낭만소나무가 좋아 하는 영웅문2부 '신조협려'의 주인공 "양과" 가 생각나게 합니다.

양과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여 그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다면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위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양과의 아버지 '양강'은 신조협려의 전작인 '사조영웅전' 에서 선대로 부터 이어진 주인공 '곽정' 과의 인연이 있지만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곽정과 그의 연인 황용을 무던히도 괴롭게 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죄업을 받아 죽기전 기막힌 운명의 장난으로 낳은 아들이 양과였으므로 후덕하고 강직한 곽정은 양과를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고 정으로 감싸주지만 황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과의 어린시절부터 자라나는 내내 양과를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모두 의심하고 질시하며 끊임 없이 감시하고 괴롭힙니다.


양과의 성격은 바로 나의 편과 다른 이를 가르는 일관된 중심이 있으며,  자유분방한 사고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로 막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가르는 운명의 순간을 넘기며 성장한 양과는 세상을 모두 아우르는 '대협'이 됩니다.

유시민은 '개혁국민당' 을 창당한 주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유시민이 남긴 서평입니다.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유시민은 책이 출간되고 난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러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점을 따로 모아 글로 남겼습니다. 이 부분을 읽어 보면 왜 '유시민 정리' 로 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노짱.jpg 대통령님은 돌아가시기 전 회고록을 써야 되겠다고 말씀하셨죠. 유지를 이어 미완의 원고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평소 남기신 글, 인터뷰, 영상과 녹음자료를 유고(遺稿)라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족한 부분은 당시의 지인들을 인터뷰하면서 메웠습니다. 여사님과 문재인 변호사님, 대통령님과 가까웠던 여러 참모들이 사실관계를 검토해주셨고요. 학자의 미완논문을 제자들이 출판하거나 소설가의 유작을 가족 중 누군가가 마무리하는 것처럼, 대통령님의 유고를 제가 자서전 형식으로 마무리했다고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처음 자료를 보면서 글의 형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서전 형식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님 생각을 전달하려면 대부분의 문장을 인용해야 하는데 논문이 아닌 글에서 3인칭 서술문과 1인칭 인용문을 번갈아 오가자니 글 흐름도 끊기고 몰입이 안 되어 형식적 완결성이 현저히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대통령님 생각을 필자의 간섭 없이 전달하기에는 1인칭 시점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죠.

 

제가 1인칭 시점의 자서전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여사님께 여쭈니 여사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 그래서 “제가 영매가 되어 대통령님 목소리를 불러 오는 겁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고개만 끄덕이시면서 “아, 예. . .”하고 가만히 미소 짓길래 허락하신 거라 생각하고 자서전을 집필했습니다.

  

영매가 되어 보낸 지난 6개월이 IMG_5332.jpg  쉽지는 않았습니다. 대통령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이런 상황이었겠지, 하고 내적대화를 나누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아치면 잠시 글을 멈추곤 했습니다. 저와 생각이 똑같지는 않았던 대목,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 돌아보니 그때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다시 돌아보게 되는 장면들.

 

처음에는 대통령님이 남기신 모든 자료를 시간 순에 따라 편집했습니다. 그 다음은 돌아가시기 전, “이제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을 써야겠다”고 말씀하신 순간의 시점으로 돌아가 전체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매 순간 그 당시의 대통령님 심정을 상상하면서 대통령님의 말씀 자체는 고치지 않되 감정전달이 좀 더 되도록 다듬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만든 초고를 몇 분에게 보내 검토를 요청하니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제가 집어넣은 몇 개 문장을 정확하게 짚어내 빨간줄을 그어 답을 보내더군요. 빨간 줄 아래에는 이런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대통령님은 이런 표현을 쓰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대통령님의 문장이 아닙니다.”. . .그리고 수정 원고를 첨부한 이메일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물론 저(윤태영)도 대안은 없습니다.”(^^;;)

 

그래서 또 고민하고. 다시 수정하고. 다시 여러분들과 검토하고. 또 수정하고.

 

처음에는 대통령님 말씀과 제가 끼워 넣은 설명이 따로 움직였는데 차츰 하나로 합쳐져 제 문장이 도드라지지 않고 대통령님 말씀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단문으로 경쾌하게 나가던 제 문체가 단호했던 대통령님의 평소 어조와 차츰 구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말과 글이 녹아 들어가면 생각과 감정도 그렇게 되나 봅니다.

  

원고를 최종 마무리하던 마지막 보름, 마지막 1주일. 대통령님이 그 순간 어떤 마음이셨을까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영매 노릇하기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마지막 원고마무리 때 만났던 이창동 감독이나 문성근 선배 등이 “빨리 그 원고를 털어야지 그러다간 어디 치료받으러 갈 일 생기겠다”고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과정도 슬펐지만, 이 원고를 끝내면 이제 대통령님과 정말 이별이겠구나, 영매 노릇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슬펐죠. 뭐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글 쓰면서는 늘 대통령님을 만나는 기분이었으니 따뜻하고 다정한 슬픔과 분노와 좌절감이 동시에 들었다고나 할까요.

  자세하게 더보기 http://blog.yes24.com/document/2249710

 

 

생애를 다루다


노무현 대통령 관련 책들
여보,나좀 도와줘
노무현 저
노무현은 왜 검찰은 왜
박희준,이우승,김태훈,정재영,김정필 공저
운명이다
노무현 저/노무현재단,유시민 공편

 제1부 출세  제2부 꿈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제4부 작별
 

1. 유년의 기억
2. 은인 김지태 선생
3. 내 인생의 부산상고
4. 막노동판에서
5. 권양숙을 만나다
6. 사법고시 합격
7. 세속의 변호사
 1. 부림사건
2. 운동 전문 변호사
3. 사람 사는 세상
4. 분열과 좌절
5. 국회의원이 되다
6. 청문회 스타
7. 의원직 사퇴
8. 김영삼과 결별하다
9. 『조선일보』와 싸우다
10. 첫번째 낙선
11. 야권통합
12. 지방자치실무연구소
13. 두번째 낙선
14. 세번째 낙선
15. 정권교체의 감격
16. 다시 국회로
17. 종로를 떠나다
18. 자동차 산업 살리기
19. 네번째 낙선, 노사모의 탄생
20. 해양수산부 장관
 1.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다
2. 광주의 기적
3. 김대중 대통령과 나
4. 후보단일화
5. 단일화 파기의 우여곡절
6. 대통령 당선
7. 구시대의 막차
8.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거짓말
9. 양극화
10. 부동산 정책
11. 방폐장과 세종시
12. 대북송금특검법
13. 탄핵
14. 이라크 파병
15. 남북관계의 핵심은 신뢰
16. 한미 자유무역협정
17. 남북정상회담
18. 국정원장 독대보고
19. 검찰 개혁의 실패
20.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
21. 대연정 제안
22. 원칙 잃은 패배
23. 청와대를 떠나다
 1. 귀향
2. 봉하오리쌀
3. 화포천, 둠벙, 무논
4. 장군차
5. 국가기록물 사건
6. 수렁에 빠지다
7. 노무현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본 세상
       


태어나 학창시절부터 정치입문을 하고 마지막 가는 그때까지의 모든것을 담은 책.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인터넷서점에 등록되어 있는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3당 합당 때의 그 분개어린 감정과 현실정치에의 갈등.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회고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검찰개혁을 조금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인 보복에 대한 참담한 심정등도 모두담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그해 2월에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모든 학교가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열었다. 진영중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부당한 일이니 백지를 내자고 급우들을 선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기 싫은 터에 잘됐다면서 모두들 백지를 냈다. 나는 택(턱)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라 쓰고 이름을 적어서 냈다. 감독하러 들어온 여선생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괘씸죄에 걸려 교무실에서 종일 벌을 섰다. 그런데 그날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더 반감이 생겨서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큰형님이 꾸지람을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반성문을 쓸 일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버텨야지, 사내놈이 왜 도망을 치느냐는 것이다.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러나 반성문은 끝내 쓰지 않고 경위서만 냈다. 다행히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나 힘들었다

연애와 결혼

서로 사랑했지만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다.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가 고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붙들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60명만 뽑았기 때문에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장모님 보시기에 나는, 귀한 딸 밥 굶기기에 딱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재주 있는 막내가 고시에 붙을 것이라고 믿은 형님들은 나중에 학벌 좋고 집안 좋은 부잣집 처녀한테 장가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미리 김치국을 마셨다. 어머니는 아내의 친정아버지 전력 때문에 고시 합격해도 판검사 임용이 안 된다고 걱정하셨다.

부림 사건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3당합당 반대
이해찬, 이상수, 김정길, 이철 의원과 함께 마포에 비밀 사무실을 얻었다. 모임 이름을 ‘정치발전연구회’로 지었다. 우리는 각자 소속 정당 안에서 야권통합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3당합당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맞았다.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세 사람이 상식을 뛰어넘어 세 정당의 합당을 전격 선언한 것이다. 1990년 1월 국회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여당 민자당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통일민주당의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스가 결정하면 무엇이든 모두 우르르 따라갔다.

3당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 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 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합당으로 인해 한국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소신도 원칙도 없이 국회의원 당선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떼를 지어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 돌아다니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20년 동안 나는 쉼 없이 싸웠다. 지역 분열주의에 맞섰고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내세웠던 구호 ‘원칙과 통합’은 이 기나긴 싸움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3당합당은 국가적 분열이자 민주 세력의 분열이었기에, 분열에 가담할 수 없어서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노동 현장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영남과 서울에서 옛 통일민주당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청문회에서 얻은 명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회 활동도 뒤로 밀어 버렸다. 민자당이 국회만 열면 날치기를 하니 국회에서는 할 일도 없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지구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을 모아 단합대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언어 습관
무엇보다 말이 문제였다. 나는 구어체 현장 언어를 구사했으며 반어법과 냉소적 표현을 즐겨 썼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이런 언어습관이 생겼다. 그때는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 필요한 시대였다. 언로가 막혀 있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반정부 투쟁을 하는 데는 그런 어법이 효과가 있다. 야당을 할 때도 억울한 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격앙된 때가 많아서 그렇게 했다. 대통령후보가 되고 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언어습관을 고쳤어야 했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는 극복해야 할 문제였지만, 국민들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는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일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이 약점을 정말 집요하게 공격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도하고 인용했다. 현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던 말도, 언론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보도하면 아주 품위 없는 이상한 말이 되어 버리곤 했다. 퇴임한 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노무현을 기억하는 이들


YES24의 서평이벤트로 인해 주옥같은 서평들이 많이 올라와 있지만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만 전해 보겠습니다.


 멈추지 않는 청년의 꿈 http://blog.yes24.com/document/2267985

운명이다이 책을 덮은 후 한동안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뭔가 찌릿하면서 쉽게 떠나지 않는 표현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운명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운명이란 말을 굳이 풀어 쓴다면 정해진 길로 삶이 간다는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 그의 삶은 다른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하고 격동적이었다. 물론 자신은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결코 그의 삶은 실패한 인생이 아니다. 시야가 좁은 이들에게는 많은 부분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고 젊은이들에게는 꿈과 용기 그리고 도전 의식을 주었다. 결국 그의 마지막이 기존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에 의해 희생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쉽게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유시민씨가 정리한 프롤로그 부분이 인상적이다. ‘청년의 죽음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 표현 앞에 무언가 강렬한 열정이 끓어 오름을 느꼈다. 사실 그의 청춘은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지나갔다. 대학교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폭발할 것 같은 20대의 젊음을 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정처 없이 떠돌며 방황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열심히 공부해서 법관이 되기 위해 공부를 했을 뿐, 체 게바라처럼 젊은이들의 우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잃어버렸던 젊음의 열정을 되찾았다. 30대 중반이 되어서 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고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후 그는 평생을 20대 청년처럼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먹으면 안정을 찾고 좋은 지위를 찾는다. 대학교 때 그렇게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게 변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젊었을 때의 꿈을 단순히 이상적 한계로 치부하며 현실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결국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한 가치관과 철학을 갖고 옳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외쳤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 먹고 철없는 행동을 한다고 비웃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뚝심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론 대통령이 되고서 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시기하는 세력의 권모술수의 협착일 뿐 그가 이루어 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청춘, 그리고 청년, 결코 나이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아직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고지식하며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따른다. 나 역시도 그랬다. 생각해보면 예전 노전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 그를 매우 비판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청년이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젊음이 아름다워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 타협하고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려 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순하게 길들여져 살아 나갈 뿐이다. 그리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사회는 점점 냉랭해져 간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 면에 있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사회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청년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실현시킨 모범이 되었다. 이상을 현실로 실현시킨 사람, 그것이 바로 그가 아닐까 싶다. 비록 노무현이란 청년은 죽었지만 그의 모습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그 뒤를 이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세월이 지나도 노전대통령처럼 꿈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노무현을 기억하는 이들 중 그를 진정으로 지지하였거나 혹은 단편적인 일부 기억만이 있는 사람들 그 어떤 유형이던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미 고인이 된 이를 증오어린 태도로 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참여정부 시절 그와 정치적 노선이 다른 이들의 입장일 뿐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낸 한 인물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나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증오는 아닐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온갖 영웅물들이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등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 두드러지는 현상은 배트맨 비긴즈나 2010년 신작 '로빈후드' 에서와 같이 어떠한 삶을 거쳐 사람들의 앞에서는 자리에 올라 군중들의 마음을 움켜잡고 끌어가는 사람이 되었는가에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낭만소나무가 볼때에도 현대는 영웅이 나오기 힘든 시대, 격변의 시대를 지나고 발전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안정화 속에 혼돈이 있는 시대입니다 .이럴때에 우리가 2만불 시대를 살게 해준 앞선 세대의 그 시절 그때 치열하게 살아오며 누구나가 인정할 만하며 고되지만 지조 있고 일관된 철학을 가진 채 평생을 살아온 이를 어찌 다시 만들 수 있을 까하는 의문마저 듭니다. 

아 나는 다시 노무현 과 같은 일생을 살아온 이를 남은 생애동안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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