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알수록 재미있지만 관심을 두지 않고서는 오히려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TV와 같은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에게 역사드라마는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하는 경우는 지양되어야 함이 마땅하죠. 물론 기록된 바가 구체적일 때 그러하고, 몇줄의 기록만 있는 경우에는 상상력이 가미되어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여말선초의 경우에는 다수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왜곡의 여지가 많지 않으니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리 그려지게 되는데, 드라마 정도전은 건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보니 이성계를 미화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름 크게 문제삼을 만큼은 되지 않아 보입니다.

앞서 역사를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고 말한 부분에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하는데,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수직적인 흐름 뿐 아니라 타국의 상황도 고려해 보면 더욱 재미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이세민과 정관의 치

이방원의 경우와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못해도 비슷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의 당나라를 건국한 것은 이연이지만 실질적인 공헌도는 이세민이 가장 컸습니다. 이연은 무능한 자가 아니었지만 천하통일을 이룰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는데, 이세민의 탁월한 기지와 판단력이 건국의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세민은 우리나라와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 굳이 타국의 왕을 칭송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말하는 정관의치를 굳이 함께 떠받들어 주어가며 말할 필요는 없지만 이세민은 중국의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인물임은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당의 고조 이연은 적장자에게 세습하고자 장남 건성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건국의 공헌도를 따지자면 이연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이세민을 홀대하게 되었다는것은 불행의 시작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세민은 쿠데타인 현무문의 정변을 일으켰고, 결국 태종에 올라 연호를 정관이라 하였고, 치세기간에 국력이 강성하고 번영하여 '정관의치'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당나라는 사실상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의 큰 번영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죠.

건국왕이 뜻을 같이 한 공신을 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만 해도 공신들을 내치느라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정도전을 시청하던 중 신하들이 방석을 반대한 이유가 나왔었는데 혹여 기억하는지 모르겠군요. 나이가 찬 다섯형제가 있는데, 이복 동생을 포함하여 보면 전체에서도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면 여러 형제들의 화합이 깨질 것이 우려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정도천을 찾아가 제발 도와달라고 무릎까지 꿇습니다. 이방원은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도와 대업을 이룬 장본인이라 정도전과는 완전 상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 했다는 것은 이방원이 이성계와 유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정도전을 설득하려는 자리에서 이방원은 말실수를 합니다. 강력한 왕권만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요청이었죠. 드라마 뿌리깊은나무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드라마라고 해서 모두가 다 허위인것은 아닙니다. 신권의 강화 라는 것은 시스템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른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게 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제대로 지켜진적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지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재상이 책임정치를 하는 시스템이니 마치 책임총리제와 다를바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정도전은 이런 시스템에 의한 정치를 꿈꾸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성계를 파트너로 삼은 것이죠. 또한 이성계는 이런 이유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준은 안되지만 적어도 드라마상에서는 서로의 이익을 취하려 할지언정 기본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전에게 왕권강화를 이야기 하니 통할리가 없겠죠.

 

정도전정도전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방원은 자충수를 두고 말았고,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렇게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 이방원은 절치부심 와신상담하여 결국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물론 더불어 정도전까지 제거!

 

재상이 책임지는 시스템에 의한 정치를 꿈꾼 정도전

역사의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방향 자체는 정도전이 옳았다는 것을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은 그렇습니다. 서구에서는 의회 정치가 발달하는 시기에 이미 검증이 된 부분입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전제왕권이든 붕당정치든 뭐든 제대로 해나가기만 하면 나쁠 것은 없겠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은 시스템의 헛점을 만들어 내고, 고인물이 썩듯이 전제왕권이 오래되면 부패하다 혁명이 일어나 붕당정치가 일어나는 등 역사는 돌고 돌아 갈 뿐 답을 내주는데는 인색합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를 실질적으로 몰아내고 맙니다. (드라마에서는 본인이 정치에 회의를 느껴 물러나는 것으로 그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 정도전도 같이 희생되고 말죠. 이방원은 허수아비 임금을 세우는데 바로 정종 이방과입니다. 그는 동생이니 '세제'가 되어야 함에도 '세자'가 되는데 직접 이성계를 잇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방과는 이방원 만큼은 아니어도 능력이 있고 큰 체구에 전투에 능하며 어진 인물로 건국에 공을 세웠지만 욕심이 적은데다가 처신을 잘하여 죽을 때까지 잘먹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조선을 세운 실질적인 사상가  정도전

드라마에서도 잘 나오고 있지만 건국의 사상적 기반은 모두 정도전에게서 나왔습니다.
최초의 헌법전인 <조선건국전>도 정도전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조선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 정도전에 의해 입안된 것들이었으니 건국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유방이 장량을 쓴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것" 이라는 말로 짧게 요약이 될 수 있겠네요. 이런 점을 이성계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하니 정도전의 위상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그가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지 않았다면 보다 발전적인 시스템에 의한 정치가 발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역사적으로 이방원처럼 스스로 난을 일으켜 집권한 케이스는 대개 나쁘지 않은 정치를 합니다. 물론 강력한 전제왕권인 상황에서 추친한 일들을 모두 업적으로만 평가할수는 없겠죠. 태종의 업적으로 일컬어 지는 것들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었고, 그것을 이방원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대로 기틀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는 문제이니만큼 이방원의 정치는 평가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신문고를 설치하고 관리 등용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호구법과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노비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기술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는 등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정도전이었다고 해서 못했을리는 없다는 생각도 들죠.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방원은 몇몇 잘못된 정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바로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한 제도인데, 본격적인 시행은 <경국대전>편찬 이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정책이 과할 때는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종 차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인재관리에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여러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것이죠.

아무튼 정도전은 이방원이 자신의 뜻에 방해가 될 대척점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공신의 명단에서도 제외시키는 등 권력에서 밀어내 보려고 했지만,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 이후 몇해가 지나 이방원과의 건곤일척의 대결 끝에 목숨을 잃어 버렸으니 아까운 인재가 스러진 이유는 이렇게 지나친 강단으로 화합을 몰랐던 부분에서 시작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 이래로 많은 왕조에서 승계를 위한 갈등이 있고, 불의한 일로 왕이 목숨을 잃거나 하면 형제가 왕좌를 이어나가는 일이 드물지 않으니, 이성계가 이방원을 지나치게 몰아 세우지 않고 그를 후계로 삼은 후 방석에게 다음을 잇게 하는 합의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건국 초이니까 가능한 생각이겠지만요.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 와신상담하고 있던 방원에게 찾아온 하륜
온실속의 화초와 같은 방석이 제아무리 성군의 자질을 가졌다고 해도
건국을 이끈 이방원의 거친 칼날앞에 무사할 수는 없으니
이성계의 판단력이 무뎌졌다고 보는게 맞지 않나 싶다.

이성계의 실수는 이방원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 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정도전도 마찬가지겠군요.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만큼 큰 역할을 했던 이방원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정도전이 꿈꾼 시스템의 정치가 나라를 다스리는 건 시대적 흐름이자 요구였기도 하지만 이성계의 무력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방원이란 인물은 그런 과정속에 자신의 존재를 가장 높은 곳까지 이끌어 내어 대업의 최대공신이 될 정도였으니 결코 이성계 외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자였으며, 이러한 점을 만인이 모를 수가 없으니 이방원은 결코 내리 누른다 해서 수그릴 인물이 아니며 외려 그가 뜻을 품고 일어서면 힘들 보태줄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 했다는 이야깁니다.

정도전의 시스템에 의한 정치가 보다 더 확고히 자라 잡은 후라면 이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다 해도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방원 같은 인물이 가만히 숨죽여 지냈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니 정도전이 의도한 내리누르기는 애초부터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명나라 주원장과 영락제, 당의 고조 이연과 이세민의 이야기 외에도 동서양의 많은 역사속에서 건국초기 출중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가진자는 경계를 받기 마련이지만 결코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고 오히려 난을 일으켜 스스로 권력을 손에 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도전이 역사에 해박했다면 이런 점을 감안하여 더욱 더 신중히 이방원을 견제하려 했을 테지만 역시나 실패하고 말았고, 목숨까지 잃었던 것입니다.

이방원과 정도전, 새로운 시작을 위해 힘을 모아 조선을 건국하였지만 본래부터 바라보는 곳이 다른 둘이었고, 왕권강화와 재상정치와의 맞부딪힘 속에서 결국 부딪혀 깨진 것은 정도전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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