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원의 전설 "앤디훅"

Posted at 2005. 11. 30. 10:33// Posted in 세상모든리뷰/보관창고
출처 : 딴지격투전문우원 토끼대장님.

K-1, Pride, KOTC와 같은 이종격투전이 뻔질나게 방송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실로 본 필자가 바라고도 바라던 세상이 되었고 강남 한가운데 빌딩을 사서 1층은 태권도, 2층은 무에타이, 3층은 극진카라테... 요런 지랄 발랄한 필자의 꿈도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되고 있는 이 때에 무심코 생각나는 불세출의 파이터가 한 명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의 K-1을 있게 한 장본인 중의 하나인 안디∼∼∼ 훅∼∼ 인 것이다.

지난 딴지 96호에 뺑아리 눈물만큼 잠시 소개되었던 앤디 훅. K-1에는 지금도 잘나가는 걸출한 어빠야들이 즐비하건만 아직까지도 수많은 K-1 팬들이 앤디 훅의 옛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음이다.

은퇴한 뒤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수시로 말했을 만큼 개인적으로 쪼가 자신 있게 생각했던 마스크라던가 한때 K-1의 잘나가는 파이터로서 킥복싱-무에타이 선수들도 출전하지만 일단 킥복싱이라고 통칭하겠다-의 전유물이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던 K-1의 링에 홀연히 나타나 카라테의 수호신으로서 당당히 군림해왔던 뛰어난 실력도 그의 인기비결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앤디 훅에 대한 진한 기억을 대갈통 속에 박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단지 그가 쫌 생긴 파이터여서 그리고 쫌하는 파이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부터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살이를 훔쳐보며 오늘날의 K-1을 있게 한 장본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살펴보자.


파이터의 피가 흘렀다??

앤디 훅은 스위스 출신이다. 다민족국가 스위스의 터줏대감은 켈트족의 한 분파인 헬베티아족으로 천성이 용맹하고 사나웠다고 한다(진짠지는 그때 안 살아봐서 모르겠다). 약 2000년 전 이미 지금과 거의 흡사한 국경을 가지고 있던 스위스는 한때 스위스용병이라는 수출품(?)으로 명성이 높았더랬다.

스위스용병의 피가 흘렀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앤디 훅의 아버지 역시 용병이었다고 한다. 앤디 훅의 양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부친과 모친 모두 그가 아주 어릴 적에 행방불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할매, 할배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씩 앤디 훅의 출생에 대한 예를 들며 앤디 훅의 몸 속에 흐르는 헬베티아족의 피가 그를 전형적인 파이터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부분은 지나친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앤디 훅 외에는 아직 이렇다할 스위스 출신 파이터를 별로 보지 못했다.


극진가라테로 빛보다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가던 어린 앤디는 낙엽이 왕창 떨어진 가로수 밑에 거적 깔고 앉아 있는 한 도사를 만났다. 그 도사는 앤디의 비범한 용모에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주먹으로 먹고살끼다"

이것이 바로 앤디 훅이 무도의 세계로 뛰어든 계기가 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암튼 앤디 훅은 십대 초반 극진카라테에 입문하게 되었고 열아홉 되던 해 비행기 타고 일본까지 날라와 카라테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첫 출전한 제3회 극진카라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앤디 훅. 승승장구하던 앤디 훅은 아쉽게도 16강전에서 현 마쓰이파 극진카라테 총수인 마쓰이 쇼케이(한국명 문장규)를 만나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4년 후인 제4회 세계선수권에서 앤디 훅은 또다시 승승장구하며 이번에는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때도 하필 상대가 전 대회에서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마쓰이 쇼케이가 아니던가.

앤디는 이번에도 아쉽게 연장 2회전에서 마쓰이의 안면을 주먹으로 쌔려버리는 반칙을 범해 감점을 받고 패하게 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음이다. 만약 그때 앤디 훅이 얼굴 안 때리고 그저 잘 싸워서 이겼더라면 외국인 최초의 세계선수권자라는 명성을 프랜시스코 휘리오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암튼 앤디 훅은 외국인으로는 처음 극진카라테 세계선수권 결승에 진출하는 성적을 얻으며 제4회 세계선수권을 기점으로 세계무술판에 쪼그만한 명함 하나를 들이밀게 되었고 프랜시스코 휘리오라는 또 다른 걸물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극진카라테 외국인 짱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정도회관으로 가다


앤디 훅은 91년 은퇴를 선언한 뒤 정도회관으로 옮겨가게 된다. 앤디 훅이 극진회관을 버리고 정도회관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제5회 세계선수권에서의 판정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건은 제5회 세계선수권에서 벌어진 앤디 훅 VS 프랜시스코 휘리오전에서 일어났다. 두 선수 모두 극진카라테에서도 알아주는 거물급 선수였으며 당시의 경기는 2번의 연장전까지 가는 혈전이었다.


사건은 문제의 2번째 연장전에서 벌어졌다. 주심의 중지사인이 난 직후(혹은 동시에) 프랜시스코 휘리오는 소도 때려잡을 쇠몽둥이 같은 그의 다리를 들어 앤디 훅의 얼굴을 향해 발질을 시도하였고 '아 중지구나. 쫌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던(?) 앤디는 여지 없이 안면을 구타 당해 고대로 꼬꾸라져 버린 것이다.

경기는 프랜시스코 휘리오의 승리로 끝났고 앤디측에서는 중지사인 후의 공격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주장을 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도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불세출의 무도가 최배달 아저씨가 "항시준비, 철저대비"와 같은 무도의 정신을 내세우며 여지없이 말을 씹어 부렀다. 멈추라는 말을 듣고 방심하여 얻어맞는다는 것은 공수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최배달 선생님의 말씀이다.

이 글을 읽고 문득 생각이 날 것이다. 코믹스 격투왕 맹호(요즘은 그레플러 바키로 나오더라)에 이러한 장면이 있었음을. 그것은 작가가 기냥 재미로 써놓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그 가운데 하나가 앤디 훅과 프랜시스코 휘리오의 대결이다.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던 91년 앤디 훅은 은퇴를 선언하게 되고 후에 정도회관으로 스카웃(?)되어 간다. 그러나 앤디 훅의 정도회관 이적은 프랜시스코 휘리오전에서의 판정에 대한 불만에 의한 반발심리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정한 이유는 앤디 훅 본인밖에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앤디 훅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다.


K-1 링에서 작살나기 시작하다!

앤디 훅이 처음 K-1 링에 서게된 것은 1993년의 일이다. 93년에는 토너먼트전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원매치전에 참가했었고 토너먼트전에 참가한 것은 94년부터의 일이다.

94년초 K-1 초대 우승자인 크로아티아의 브랑코 시카틱을 작살낸 앤디 훅은 카라테 최초의 K-1 우승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어깨에 짐이 너무 무거웠던가보다.

이후 94년 K-1 그랑프리에 출전해 패트릭 스미스에게 단 19초만에 개박살나는 망신을 당한 것. 이때의 경기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한다.

"원래 카라테경기에서는 맞아 터져 자빠졌을 때 발딱 안 일어나면 패배하게 된다. 때문에 앤디 훅도 KO 당하고 나서 발딱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패인이다. 원래는 심판의 카운트를 보면서 10카운트 다 되어갈 때까지 기다리며 정신을 차렸어야 했을 것을..."

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카라테의 시각에서 본 것일 뿐 아무리 카라테가 몸에 익었다 할지라도 링에서의 경기운영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도 숙지하지 못했던 앤디 훅의 실수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94년 앤디 훅이 경악의 패배를 당한 후 K-1 최초의 카라테 우승이라는 짐은 정도회관의 동료 사타케 마사아키에게 옮겨졌지만 사타케 역시 결승전에서 제왕 피터 아츠의 어뢰를 맞고 꼬로록 격침되었다.

역대 K-1 선수 가운데 일본인으로서 K-1 결승까지 진출한 것은 94년 사타케 마사아키가 유일하다. 참고로 사타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만화방에 가서 '우리의 격투왕'이나 '격투왕 강호'를 빌려보시기 바란다. K-1 93, 94 전후의 사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주인공은 사타케다.
95년에는 훗날의 친우인 마이크 베르나르도와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마이크 베르나르도의 번쩍이는 머리를 이용한 시선방해작전이 있었던지 암튼 여지없이 개박살났다.

같은 해 앤디 훅은 또 다른 거물과 맞붙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4번의 K-1 우승에 빛나는 미스터 퍼펙트 어네스트 호스트였던 것이다. 마이크 베르나르도전처럼 개박살나지는 않았지만 역시 앤디 훅의 패배.
꾸준히 엘리트코스만 밟아왔던 앤디 훅에게 있어 94, 95년은 최대의 암흑기였으며 당시 앤디 그에게 쏟아진 원성도 적지 않았다.

가라테 수호신의 탄생!

96년 앤디 훅은 카라테맨으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K-1에서 우승하게 된다.

96년 앤디 훅은 K-1 그랑프리 준결승에서 스스로 "가장 힘들었던 경기"라고 말했던 어네트스 호스트와 경기를 펼치게 된다. 당시의 경기는 재연장까지 가는 승부였다.

필자 역시 K-1 팬들을 대상으로 한 Best Bout 투표에서 두 번째 베스트매치로 이 경기를 뽑았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K-1 최고의 경기는 95년도에 있었던 제롬 레 배너와 녹비드 데비의 경기이며 참고로 K-1 팬들이 선정한 최고의 경기는 2000년 피터 아츠와 제롬 레 배너의 경기되겠다. 제롬이 머리통에 피터 아츠의 발차기 직격을 맞고도 홀연히 일어나 야수처럼 달려들어 피터를 격침시켰던 그 경기 말이다.

96년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까지 앤디 훅이 단 한차례도 이겨보지 못했던 마이크 베르나르도. 96년 마이크 베르나르도는 제왕 피터 아츠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하며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마이크 베르나르도는 피터 아츠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 지 연방 하늘을 보면서 두 팔을 벌리더구먼.

앤디 훅의 팬들 가운데는 96년 결승전을 K-1 최고의 경기로 꼽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96년 결승전에서 앤디 훅이 자신의 가장 화려한 피니쉬기술 즉 훅토네이도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96년 K-1의 우승으로 앤디 훅은 '카라테 수호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이후 97, 98년 K-1에서도 결승에 진출하였다. 앤디 훅을 매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3회연속 결승진출은 앤디 훅뿐이다"며 앤디 훅을 추켜세우기도 한다.

96, 97, 98년의 3년 간이 앤디 훅에게 있어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참고로 96년 앤디 훅이 K-1에서 우승할 당시 앤디 훅의 격투스타일이 약간 변화되었다. 과거 발차기에 큰 비중을 두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펀치 수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몇몇 전문가들은 발차기 위주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펀치기술을 사용하는 스타일로의 전향이 96년 우승의 비결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광에 묻혀 떠나다..

앤디 훅은 2000년 8월 24일 전골수성급성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64년 9월 7일생이니 36살의 생일을 2주일 남기고 영원히 링을 떠난 것이다.
앤디 훅의 장례식은 일본에서 한 번 그리고 스위스에서 또 한번 치러졌는데 일본에서의 장례식에는 1만 2000명이라는 조문객이 몰려들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앤디 훅의 장례식을 가리켜 "역대 스뽀오츠 스타의 장례식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었다.

앤디 훅의 사망 후 K-1측에서는 외아들의 학자금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으며 Andy hug Memorial(제목은 바뀔 때가 많지만)이라는 대회를 신설하여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앤디 훅이 사망하던 날 조국 스위스에서는 대통령 긴급성명으로 앤디 훅의 사망소식이 발표되었으며 조국에서 치러진 두 번째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취리히 시장이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어떤 무도가도 죽는 순간 이만한 명예를 얻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앤디 훅이 단순히 강한 파이터였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토록 명예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앤디 훅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파이터 경력보다 그의 인간미에 많은 사람들이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앤디 훅은 조국 스위스에서 작은 의료기기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사업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세계적인 파이터로 명성을 얻으며 부를 축적하였지만 항상 겸손하고 검소하며 예절바르게 행동하였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또 다른 스위스의 스뽀오츠 스타 마르티나 힝기스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물론 힝기스는 자린고비, 앤디 훅은 바른생활 사나이처럼 비교된다.
실제로 많은 스위스인들이 앤디 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스위스에서 앤디 훅의 경기가 열리면 시청률이 50%를 넘어서기도 하였다고 한다.

앤디 훅은 자신이 사망하기 얼마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인 이로나와의 이혼을 무효로 돌리라는 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두고 죽음을 직감한 앤디 훅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선물(재산분배)이었다고 말한다.

바른생활 사나이처럼 항상 겸손하고 검소하며 예절바르게 행동했던 앤디 훅. 서양인이면서도 가장 동양적인 무술스타일을 고집했던, 동양인보다 더 동양인에 가까웠던 사람이 바로 앤디 훅이다. 그는 완성된 파이터이기 이전에 이미 완성된 인간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피터 아츠, 어네스트 호스트와 함께 K-1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장본인. "푸른 눈의 사무라이"라는 별명답게 가장 동양적인 서양인 파이터였던 남자. 수많은 K-1 파이터들 가운데 무도가의 영혼, 무도가의 투혼과 같은 이상적인 말들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 영혼으로 싸우는 무도가. 그가 바로 앤디 훅이다.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앤디 훅의 사망 후 필자는 개인적으로 앤디 훅의 추모사이트를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앤디 훅의 팬들이 방명록에 조문의 글을 남겼더랬었다. 그 가운데 앤디 훅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글이 있어 마지막으로 소개하겠다.


"다시 태어나도 무도가로 태어날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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