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운영하는 나는 드라마 '응사'에 나오는 바로 그 세대다. 90년대 말 4대통신 활동도 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문화대통령으로 불릴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으며, 초기 인터넷의 발달과정을 20대에 겪었다.

세월따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어렸을 때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내세우는 사람이 그렇게 안좋게 보였다. 적고 많음의 차이가 있을 뿐 다수가 이런 성향을 갖고 있는게 현실이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성취했으니 알아 달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일종의 보상심리다. 필자가 군생활 하던 시절에는 고참들이 선임으로서 해야할 도리는 하지 않으면서 후임을 부려먹으려는 줄만 알았는데, 직접 고참이 되고 나서야 후임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넓은 포용력으로 후임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너희들도 고생해 바야 한다는 심리는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잘났든 못났든 고참이 되었을 때의 보상심리는 대개 그릇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비교적 후임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던 고참들도 본인이 직접 구타를 하진 않더라도, 동기가 하는 것을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방법론적으로 동의는 하지 않지만 그 뜻이 틀리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일게다.

그런데 실은 방법적인 문제 뿐 아니라 그런 생각도 틀렸다. 보상심리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얼마전 유시민 전 장관은 집필한 책에 대한 소개를 하는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역사의 과정에 자기 생각을 담아냈다고 말하면서 직접 겪고 알고 있던 사실이라도 내가 알고 있는 부분외에 모르던 부분까지 공부해야 비로서 책을 써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지식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까지는 괜찮으나 그것을 남에게 전파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루 살핀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그 때 그시절을 살아본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릇된 보상심리의 발로다.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시절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더욱 크게 분노한다. 세상의 순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이요 행동이다. 시간은 한방향으로 흐르고, 흐르는 물은 돌이킬 수 없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통하려면 그 진리의 한자락이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인데, 자신이 생각하는 한줌도 되지 않은 지식과 경험을 곧 세상의 진리로 착각하는 부류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알아주거나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이 부정당한 것처럼 분노한다.

배울점이 많은 어른은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방법대로 따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해주는게 아니라 가고자 하는 길을 찾는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그릇된 보상심리가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 내가 실수한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모든 경우에 통하는 정답이라 여기거나 자신이 생각한 성공했다고 하는 방법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어른들은 내가 이렇게 해보니 이렇더라 하며 그 방향대로 가라며 모두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 포장하곤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사는데 보상심리에 휘둘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좋은 어른은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종용하는게 아니라 어려운 선택이 기로에 있는 인생후배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게 아닐까 싶다. 굳이 어른이 취해야할 태도라고 좁혀서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중요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힐링캠프'에서 김창완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어른들을 너무 믿지마라. 자기 안에 너무 큰 우주가 있는데 어른들이 그런 우주를 열어주는 사람도 있지만 흔치 않다" 

이어,

"어른들의 말을 쫒아 뭔가를 하지 마라. 너히는 그 세상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고, 그 어른들의 세상은 너희들 손으로 볼 수 있다. 어른들의 말에 갇히지 마라" 

누군가는 앞에 서서 길을 제시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는길에 동행을 하며, 후미에서 두루 주위를 살펴주기도 한다. 

나는 세상에서 고유한 존재이며, 누구도 나를 대신해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 내가 앞에 설 것인지 아니면 동행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쫒아갈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간접경험이기도 하지만 다른이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책을 보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남을 따라하고자 책을 보는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만의 지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자신의 주관이 매우 강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예가 많다. 그렇지만 성공했다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주관이 강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김창완이 말한 우주를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렇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게 아닐까 싶다.

 필자의 친구들 중 직장생활을 하는 녀석들은 한결같이 "아이디어를 말하는걸 반겨하지 않고, 시키는 일에 따라주기만을 바란다" 라고 말한다. 

필자가 연예관련 글도 자주 쓰니 관련한 이야기를 더해보면, 오디션 심사를 보면서 자신의 주관을 강요하는 심사위원이 있다. 그것이 정답인양 생각하고 말하고 쫒아오는게 맞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같은 방향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잔아요 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직업적 능력 역시 성적순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 또한 마찬가지로 나의 기준을 남에게 맞추지 않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십년도 채 지나지 않아 퇴사하는 경우를 종종 듣게 되는데, 직책이 낮았을 때와는 달리 과장급 이상이 되면 자신과 맞지 않은 업무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고,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해 퇴사하게 되는 것이다.

보를 세워 물길을 온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 오만함이 담긴 사대강 사업이나 당장 배가 기울어져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이나 모두 같은 맥락이다.

따라야 한다고, 따라가는게 맞다고 했던 가르침이 얼마나 큰 희생을 불러오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나의 기준이 남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아 부족한 점을 되돌아 보고 깨어 있으려 노력하는 자와 그렇지 않고 내안의 세상에서 나만이 기준을 강요하는 자와는 천양지차라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멘토를 찾는건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을 주변에서 찾았다면 당신은 행우아일 수 있다.

정리하자면 기존의 질서를 무작정 부정만 할 필요는 없되, 왜 그런 질서가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내가 살아갈 인생에 어떤 기준으로 그 질서를 대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나는 홀로 살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질서도 고정되지 않는게 세상이다. 김창완의 말에는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들이 모여 이뤄가는 사회에서 틀에 갇힌 말이나 남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휘둘려 나 자신이 가능성을 막아 놓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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